[충청뉴스 유규상 기자] 천안 시민의 세계시민의식 함양에 포커스를 둔 “최초의 민간 국제교류 전문가”로 평가받는 (사)한미동맹협회 김연정 여성회장을 만나 한미동맹협회에 대해 시민들이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아 이 분야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 회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 지난 12월 11일 “한미동맹과 통일의 기회”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게 된 계기는?
미 육군 험프리스 기지사령부와(평택미군기지) 파트너십을 맺은 (사)한미동맹협회(이사장:송영규)와 한미동맹협회 여성회(회장:김연정)은 2025년 주한미군과 천안 시민이 함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주한 미군 가족 초청 천안문화체험을 통해, 천안의 명물인 딸기와 메론농장을 함께 체험하고, K-컬쳐박람회 및 소노벨 오션어드벤처 등에서 천안시민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문화로 천안을 홍보했습니다.
또한, 미 육군 험프리스 기지에서 “비욘드 유토피아” 다큐멘터리 상영 및 탈북자 강연, “트럼프 시대의 한미동맹과 통일의 기회” 포럼, 천안에서 자원봉사 단체장들과 ‘자원봉사와 한미동맹“ 포럼도 개최하여 지속적으로 한미동맹을 통한 각 분야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우 가깝지만 쉽게 갈 수 없었던 미 육군 험프리스 기지를 천안 시민들이 여러차레 견학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면서 심포지엄으로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미래를 향한 한미동맹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며 논의의 장을 펼친 것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미동맹이 지난 72년 동안, 전쟁의 폐허 속에서 대한민국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만들었다면, 앞으로의 72년은 한반도의 사회통합, 더 나아가 통일에 기여하기를 소망합니다.
- 통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엿보이는데 그 이유가 있다면?
대학시절, 저는 ”자원봉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학업보다는 자원봉사에 더 열중하던 중, 휴학하고 간 해외봉사 활동지가 ”알바니아“였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사회주의의 막을 내리고, 그 직후가 바로 제가 갔던 1997년이었습니다. 한국의 신문에는 ”내란“으로 보도가 되는 상황이었고, 전 그 당시 너무나 많은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돈이 있어도 살 수 있는 것은 직접 현지에서 생산하는 오렌지, 오이, 토마토가 전부였고,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수입에 의존한 상태에서 실물경제는 붕괴되고,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그런 탓에 내란(폭동)이 일어나서 무기고를 탈취하여 민간인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력의 차이를 느꼈던 첫 번째 순간인데요. 같은 봉사단에 속한 일본 사람들은 국가에서 보낸 전세기를 타고 본국으로 이송(탈출)되었는데, 저희 대한민국 10명의 대학생 봉사자들에게는 그 어디서도 연락이 안 왔습니다. 다행이 계획대로 지내다가 무사히 그 나라를 출국했습니다. 지금도 보면서 미소짓게 하는 사진이 있는데요. 제가 알바니아를 출발하여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찍은 사진입니다. 당시 가져갔던 모든 옷과 신발을 다 현지에 나눠주고, 현지에서 산 슬리퍼를 신고 당당히 걸어나오는데, 먼저 도착해 있던 다른 나라에서 활동했던 봉사자들이 맞이해주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실 동유럽 5개국에 봉사활동을 갔던 우리 동기들은 다같이 모여서 서로 치즈와 생크림이 너무나 싸고 맛있었다고 입을 모으는데, 저는 한 마디도 할 말이 없었답니다.
여하튼 그 후에 저는 북한이 매우 궁금했고,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란 노래를 부르면서 자랐던 세대로서 호기심에 대학 졸업 후, 마침 모교 대학원에 ”북한학협동과정“ 있어서 석사, 박사를 수료했습니다.
워낙 현장 활동가 타입이라서 학문적으로 고찰은 못 하고, 그냥 어렴풋이 북한의 분위기를 알게 된 것에 만족합니다. 그러한 탓에 저는 늘 남북한의 사회통합과 한반도 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두고 여러 가지의 방안들을 저도 모르게 생각하나 봅니다.
- 1990년대만 해도 자원봉사활동이 대중화되지 않던 시기인데, 자원봉사활동을 한 계기가 있 다면?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선택할 시점에 제가 매우 단순한지라 고등학교 3학년 당시, 저는 물리가 가장 쉬웠는데, 왜 친구들이 다 어려워할까, ”나는 물리를 아주 쉽게 가르쳐 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사범대학 과학교육과 물리전공을 선택,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그 단순한 물리가 대학에 와서는 완전히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는 복잡한 물리로 변했고, 게다가 160학점을 이수 해야하는 그 벅참이 저를 학업이 아닌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에 충분했답니다. 교육학도 배우는 제게 자원봉사는 경험교육으로는 최고의 교육방법이라고 생각되었고, 학업보다는 오히려 경험교육으로서의 자원봉사 프로그램 기획과 운영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문화예술 분야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 시설아동 등과 대학생 봉사자가 1;1로 짝을 맺고, 문화체험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CultureGameLeisure 기행“이라고 발레공연 관람, 축구관람(2002월드컵), 아쿠아리움, 서울영화촬영소, 눈썰매장 등을 함께 다녔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멘토-멘티 프로그램을 자원봉사활동 프로그램으로 문화체험에서 한 거죠.
지금은 대중적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제가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들을, 잘 가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가도록 도와주는 자원봉사활동을 만든 거죠. 자원봉사자로서는 하루종일 누군가를 책임지는 입장, 이게 가장 큰 도전이자 인성교육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많은 에피소드가 있죠. 저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남들이 안 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개척해서 만드는 그런 파이오니아적인 기질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 그런 차원에서 해외봉사활동 매니저도 한 건가요?
대학원 재학생 시절 자원봉사로 자원봉사활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자원봉사자를 모집, 교육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했었고, 졸업 후에는 대학생들의 세계시민의식 함양을 위해 해외자원봉사활동을 기획했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이 너무나 많은 재능을 갖고 있고, 그래서 방학을 이용하여 해외자원봉사활동을 하면 태권도, 부채춤 등의 전통공연을 보여주고 가르치는 등 문화적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부쩍 각 대학마다 해외봉사단 프로그램을 많이 했답니다. 그 시절 제 가 느낀 것은 모든 사람은 양심이 있어서 양심이 자극되면 스스로 다 잘 하더라구요. 전 최대한 그럴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고 현지인들과 많은 문화교류를 하고 싶었습니다.
혹자는 비행기 값 등의 해외 가는 경비를 지원하면 그 돈으로 현지인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단순한 비용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의 해외 경험, 그리고 현지에서 양심의 발로에서 나오는 심경의 변화, 그리고 행동들이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부터 전 ’세계시민의식‘ 이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확신했다고 할까요?
- 자원봉사활동을 하다가 주한미군과의 교류협력 프로그램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여수세계박람회 참석하셨나요? 2012년 자원봉사센터에서 하루에 1,5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을 총괄하면서 전 영혼까지 팔아서 일에 매진을 했고, 평생 할 일을 다 한 것 같아서 조용히 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을 돌며 자원봉사자들을 모집, 선발(면접), 교육하고 운영하면서 매우 적은 인원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했고, 동료 모두 과한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뒤돌아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여하튼 그 후, 좀 쉬면서 조용히 지내던 중에 (사)한미동맹협회의 회원이 되면서 주한미군과의 교류협력 프로그램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고, ’세계시민의식‘에 대해 20여년 전 치열하게 고민하며 기획했던 프로그램들이 다시 새삼 떠오르면서, 이런 프로그램들을 천안 시민들이 함께 참여한다면 새로운 장을 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2025년 새롭게 한 발짝을 뗀 것을 시작으로 더욱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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