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된 시간이 공존하는 달동네
정체된 시간이 공존하는 달동네
  • 편집국
  • 승인 2005.10.1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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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미고개

   
▲ 테미고개
보문산 오거리에 서서 고갯길을 향해 눈을 들어보면 보문산 기슭을 따라 다닥다닥 모여 있는 달동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테미고개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다. 이삼십년을 그저 지나치며 먼 산 보듯 바라보기만 했던 그 달동네에 가까이 가 보았다.

부사동에 살던 나는 자전거를 타고 테미고개를 넘어 중학교에 다녔다. 요즘에야 자전거에도 변속장치가 달려있어 그 정도 경사쯤은 자전거를 탄 채로 오를 수 있지만 그 당시 자전거야 어디 그랬던가. 차가 뜸하면 선채로 페달을 밟고 굴러가며 도로  좌우를 갈지자 모양으로 오르다가 결국엔 자전거를 끌고 고개를 넘었었다.

테미고개는 보문산 오거리로부터 시작하여 충남대학교   병원방향으로 넘어가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다. 지금은    ‘테미’라고 이름이 정착되었지만 ‘퇴미’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어원을 찾아보면 보문산의 끝부분이라는 의미의 ‘太尾’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둥글다는 의미의 ‘테’와 산을 뜻하는 ‘뫼’가 변화하여 ‘테미’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명당으로 꼽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했을 때 대전에서 제일 먼저 신사를 지은 곳이 테미라는 기록도 있다.

지형적으로 보면 보문산의 북동쪽 끝머리의 산줄기가    ‘수도산’이라고도 불리는 지금은 개방되어 시민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는 테미공원으로 이어지는데, 그 사이로 난 고갯길이 테미고개다. 금산과 옥천 방면의 대전 남동부에서 논산, 공주, 그리고 서대전으로 이어지는 왕복 6차선의 꽤 많은   교통량이 지나는 주요 도로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형성된 이 동네는 급한 경사지형 때문인지 개발과 도시정비, 재건축 등의 흐름으로부터 소외되어 왔다. 아니, 제 모습을 지켜왔다고 해야 할까. 테미는 대전에서 골목길의 원형이 가장 많이 보존돼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큰길로부터 가파른 계단으로 시작되는 이 달동네의 골목길들은 오로지 걸어서만 들어설 수 있어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낮은 지붕의 허름한 건물들의 벽과 이끼 낀 블록 담장, 그리고 축대들의 제 형편에 맞게 들어앉은 모양새와 그 틈사이로 꼬불꼬불 막창자처럼 골목길이 이어져 있다. 마주 오는 사람과 비껴 지나갈 때면 어깨라도 닿을 것 같아 머쓱하다.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양철기와 지붕 위에서는 할머니가 호박이며 고추를 널어 말리느라 손놀림이 바쁘다. 막다른 골목에 나와 담장에 기대놓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손질하는 아낙도 보인다. 담장 너머 들려오는 예닐곱 살 됐음직한 어린아이의 재잘거림이 신선하다. 이처럼 이곳엔 아직도 서민들의 삶이 있고 이 골목길에선 그들의 살 냄새가 묻어난다.

골목길을 따라 오르다 동네가 끝나면 한 평, 두 평씩 막대기를 꽂고 비닐 끈으로 경계를 둘러친 밭들을 만난다. 이 달동네 사람들이 가꾸는 밭일까. 산을 따라 오르며 이 밭들은 꽤 넓게 형성되어 있고 농작물도 꽤 다양하다. 좁은 밭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보문산 등산로와 만난다. 등산복 차림으로 산을 오르는 이들도 보인다.

눈을 돌려 테미고개길 쪽을 내려다보면 겹쳐진 지붕들 저 아래로 늘 지나던 큰길이 보이고 그 길 건너로 이쪽 지붕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지붕을 가진 집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집들 위로 벚꽃나무 울창한 테미공원이 둥글게 솟아있다. 벚꽃이 만개할 때 다시 한 번 올라와 건너다보리라 생각하며 큰길로 내려오니 잠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테미고개길은 보문산 쪽으로의 경사가 급해 도로를 2단으로 만들어 높은 쪽 도로를 인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 두 도로 사이의 축대엔 개나리가 심어져 있어 지나는 이들에게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기도 한다.

테미고개 정상에 서서 둘러보니 그동안엔 신경 쓰지 않아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저기 곧추선 대나무 장대 끝에 달려있는 흰색과 빨간색의 깃발들. 보문산의 정기(?)를 받았는지 점집들이 많다. 어쩌면 운명철학 특화거리로 지정될지도 모를 일이다.

테미고개길의 두 번째 이미지는 바로 테미공원이다. 음용수 보안시설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오다가 1995년 개방된 이 공원은 벚꽃나무 숲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수령의 이곳 벚꽃나무들은 여느 나무들과는 다르다. 처음 보면  벚꽃나무가 이렇게 클 수도 있구나 감탄하게 된다. 이곳의  벚꽃들은 머리 위를 온통 뒤덮으며 하늘에 닿아있다. 벚꽃이 한창일 때 그 안에 있으면 마치 벚꽃의 막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캡슐 안에 있는 느낌이다. 벚꽃이 만개할 즈음엔 테미공원 벚꽃축제가 열리는데 다른 곳의 벚꽃축제들처럼 장사꾼들이 축제의 주인공이 되지 않아 좋다. 그저 벚꽃을 보러가서 벚꽃을 보고 올 수 있어 좋다.

항상 개방되어 있는 이 곳은 유치원 아이들의 소풍장소로, 주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산책로로, 청춘남녀의 데이트 장소로도 이용된다. 대흥동의 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시절엔 가끔씩 직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바쁜 일 잠시 잊고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망중한을 즐기기도 했다.

늘 바쁘고 똑같이 짜여진 일상 속에 잠깐이라도 벗어나 즐길 수 있는 여유, 그런 여유를 제공하는 이런 공간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활기차고 생기 있게 만들어 주는가!

테미고개 정상에서 테미삼거리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신진건설 사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 덩그러니 서있다. 주인이 바뀌면서 새단장을 하긴 했지만 그 어색함은 여전하다. 조금 더 내려가면 테미삼거리와 만난다. 테미삼거리에서부터는 거리의 모습이 다르게 느껴진다.  꽤 높은 건물들도 도로를 따라 들어서 있고 상권도 그런 대로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충남대학교 병원 사거리를 지나 서대전 사거리 방향으로의 도로변에 매주 금요일이면 테미고개의 세 번째 이미지인 금요 장터가 열린다. 언제부터 이곳에 장이 서기 시작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일주일에 한 번 이곳은  요술처럼 활기가 넘쳐난다. 다른 어떤 장터에서처럼 만남이 있고 흥정이 있고 다툼이 있고 갈등이 있고 용서가 있다. 사람냄새가 있다. 장이 서면 도로변 주정차 차량으로 차는 좀 막히지만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은 그 활력이 내게도 전해지기 때문이리라.

‘테미고개’ 이곳엔 70~80년대로부터 현재의 삶이 공존해 있다.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개발로부터 소외되어 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달동네, 아직 장사꾼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지 않은 테미공원 벚꽃축제, 거리와 주변지역에 활기를 더해주는 테미 금요장터…. 경제와 개발 논리로 많은 변화가 찾아오겠지만 이 곳이 가진 이미지와 정체성이 크게 변화하지 않기를 여기에 소중한 추억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소망해본다.

글·사진 / 우재식 소장·건양대학교 겸임교수
예원건축사사무소 ☎042-486-9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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