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며 살 수는 있어도, 돈 벌며 공부하긴 어렵더라”
“돈 벌며 살 수는 있어도, 돈 벌며 공부하긴 어렵더라”
  • 편집국
  • 승인 2006.10.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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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생Ⅴ- 두 달간의 미국 유학 생활

김상균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홍보마케팅팀  daejeonart@hanmail.net

언제까지인가는 내 스스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면서 지내왔다. 나쁘게 말하면 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세상을 살아왔고, 좋게 말하면 너무 바쁜 나머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성격이 형성되는 것일까 아니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타고난 것일까? 5남매 중 막내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막내 아들을 신임하신 것 같다. 고교시절 학교 특별부 생활로 유난을 떨 때도 그랬고, 고교학생리포터로 발탁되어 공중파를 타고 있을 때나 고3 시절부터 늦은 성악공부를 시작해 음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 역시 막내를 믿어주셨다. 올해 만 80세가 되시는 아버지와 5년 터울인 어머니…. 지척에 살면서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지만 부모님은 지금도 역시 막내가 하겠다는 일에 반대를 안 하실 거라 믿는다.

1992년 4월, 그 때까지 음악과 방송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음악쪽은 시립합창단 상임단원과 대전오페라단 총무를 맡고 있었고, 방송은 고교시절부터 인연이 되었던 대전MBC에서 리포터로 일을 겸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한 우물을 결정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방송은 마약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발 빼기가 어렵다는 걸 경험해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자화자찬일 수 있겠지만 나는 당시 리포터 중 가장 인정받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방송국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과감히 결정을 내렸다. 잘 나갈 때 그만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고, 음악에 전념해야 할 필요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해 10월 나는 부모님 가슴에 다시 한번 못을 박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이태리 유학을 준비하다 포기한 적이 있었다. 1년 동안만 생활비를 받기로 하고 어렵게 아버님의 승낙을 얻었었지만 집안에 우화가 생겨 스스로 포기했다. 이후에도 유학의 꿈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방송을 그만두고 시립합창단과 오페라단 일도 정리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결정했다. 사실 말이 유학이지 마음속으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안 형편이 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니 도움은 전혀 받지 않기로 했다.  그런저런 상황들을 알고 계신 부모님 심정이야 가슴에 못이 박혀도 수십 개가 박혔을 것이다. 그래도 부모님과 형, 누나들은 반대를 하지 않았다.

92년 10월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다. 수중에는 1,000달러가 있었다. 집안 식구들과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인사를 나눴다. 남들이 가는 것처럼 정상적인 유학이 아니라 얼마가 걸리든 내가 벌어서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지인의 집으로 떠났다. 마치 예쁜 성냥 곽을 진열시켜 놓은 듯한 마을을 내려다보며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분의 차를 타고 필라델피아로 간 뒤 짐을 풀었다. 내가 머물렀던 그 집은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온 집안이었고 어렵게 자수성가 하여 다운타운에 중국식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차피 편히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을 먹고 미국에 왔기에 바로 다음날부터 일을 나갈 참이었다. 시차적응이 안돼 새벽에 일찍 눈이 떠지고 필라델피아의 동이 트는 모습을 보았다. 아주 적은 양의 비가 내리던 그 새벽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집주변이 온통 잔디였고 그 잔디밭에 다람쥐와 토끼들이 돌아다니고 새의 지저귐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축복받은 땅이라 한 이유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감성에 젖어 살 형편이 못됐다.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할 생각이었으니 당장 돈을 버는 일을 찾아야 했다.

이미 약속한대로 다운타운에 있는 중국식 식당 주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식당일이란 것이 고되기는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똑 같을 것이다. 학력고사 끝난 다음날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용돈을 벌어왔던 나는 그래도 그런 일에 익숙한 편이었지만 이국만리 땅에서의 식당 주방일은 심리적인 것과 맞물려 더욱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열심히 배워가며 일을 했다. 주방에는 중국사람 둘이 있었고 홀 서빙으로 베트남 아가씨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나 나나 영어가 안 되는 것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손짓발짓과 콩글리쉬를 하며 의사소통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 사회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일류대학을 나오고 이민 가서 세탁소와 슈퍼, 식당주방 일을 하며 삶을 개척해 나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도 보았고, 교포들이 모여서 사는 또 하나의 조그만 한국사회도 보았다. 집을 구하러 갔다가 귀신이 나올법한 아파트에서 쥐와 함께 살아가는 다운타운 사람들과 배달 갔을 때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문을 열던 사람들의 모습도 자주 보았다. 한마디로 관광객이나 유학생이 보기 힘든, 서민들의 사는 모습을 보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약 두 달 동안 그곳 생활을 하다 최종 결론을 내렸다. 당시 월급이 1,000달러였고 조금 일에 더 익숙해지면 1,500달러 정도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불법장기체류를 감수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돈을 벌면서 살수는 있어도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하기에는 어렵겠구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현지에서 나를 거둬준 분께 이야기했더니 그런 결정은 빨리하면 할수록 좋다면서 등 떠밀 듯 되돌아가란다. 2개월 후 나는 수중에 1,500달러 정도의 현찰과 식당주방에서 일했다는 훈장으로 양손에 열 군데가 넘는 칼자국을 가지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끔 친구들과 옛날이야기를 할 때 그 당시 일을 이렇게 너스레떤다. 갈 때 1,000달러 가지고 갔는데 올 때는 비행기표 사고 1,500달러 가지고 왔다는 건 외화획득이라는 둥, 두 달 동안 식당에서 일하면서 양손에 칼자국만 열댓 군데였고 최소한 영어로 야채이름과 양념이름은 다 외우고 왔다는 둥 마치 한 때의 무용담을 늘어놓듯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짧은 그 기간의 소중한 경험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돈이 없다는 것을 원망하기보다는 스스로 뭔가 이루어보려고 노력을 한 것이고, 덕택에 그 나라 서민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제자리를 찾는데 약 1년이 걸렸다. 1년 가량 시립합창단 비상임단원으로 활동을 하다 재 오디션에 응시해 다시 상임단원이 되었다. 대전오페라단 일에 음악협회 일까지 떠맡게 되면서 일복 많은 팔자로 다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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