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황실의 붉은 색 의상을
휘감고 강렬한 표정연기로 주목받는 김혜리(MBC 제공/노컷뉴스)
미스코리아출신 연기자에게 사극은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는 옷 같다.가장 세련된 외모와 도시적인 이미지를 가진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가
전통 한복을 차려입고 나긋나긋한 어조로 대사를 읊조리는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김혜리는 미스코리아 출신이면서도 벌써 사극만 7번, 그중에서도 왕비 역할만 4번째 도맡아 하는 사극 전문배우로 통한다. '조광조'
'왕과비' '태조왕건'에 이어 네 번째지만 기존 왕비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원나라 왕비 '기황후' 역으로 현재 '신돈'의 초반부에서 주인공을
압도하는 연기력을 발산하고 있다.
사극 예찬론자 김혜리
김혜리는 지난 90년대 초부터 활발한 연기활동을 해오면서 만만치 않은 연기내공을 쌓았다. 하지만 그녀의 대표작들은 주로 사극으로
시청자들에게 각인돼 왔다. "제가 그냥 길을 나서면 사람들이 잘 못알아봐요. 오히려 사극 분장을 하면 '아!' 하고 대번에 알아보시죠." 정작
본인은 한부분에 국한되는 것이 싫지는 않았을까? "요즘 어린 후배들은 아마도 사극하라면 지레 겁부터 먹을지 몰라요. 워낙 대사도 많은데다
전달방식이 현대극과 달라서 버거워 하죠. 하지만 한번 그매력에 빠지면 오히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매력이 있어요."
왕비 전문배우 타이틀이라도 붙을 것 같은 김혜리가 말하는 사극 예찬론이 있다. "사극은 '쌀죽'과 같아요. 쌀죽은 말그대로 아무런 맛도
없고 색깔도 없지만 한번 두번 그 맛을 보고 빠져들면 좀처럼 숟가락을 놓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사극은 밖으로 내지르는 연기가 아니라 안으로
삭히면서 대사를 하고 연기를 풀어가야 해요. 상대방과의 호흡도 중요해서 나혼자만 잘한다고 될 연기가 아니죠."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그랬듯 기황후는 분명 매력적인 인물
'신돈'의상팀은 김혜리가 연기하는 원나라 왕비 '기황후'를 위해 수백만원짜리 옷을 직접 제작한다. 벌써 10여벌이나 소화했다. 미술팀과
분장팀이 기황후를 위해 한달간 따로 준비 하는 기간을 가졌다. 서지혜가 연기하는 노국공주가 푸른색 톤의 왕비옷이라면 기황후는 중국 황실이 즐겨쓴
붉은 색상 비단옷에 금박의 갖은 문양을 수놓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의상과 소품을 사용한다. 여기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황제 아래 모든
신하들을 자신의 침대에 반쯤 누운 채로 칼바람이 일듯 싸늘한 목소리로 호령한다.
더욱 압권은 손가락에 낀 가늘고 긴 목조 손가락으로 왕실에서 즐긴 양귀비를 콕콕 찍어 맛을 보며 최고 권위의 향략적인 모습을 인상깊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껏 국내 사극에서 볼수 없었던 강렬한 왕비의 모습은 이국적이면서도 카리스마를 한껏 발산해 허탈한 웃음만 짓고있는 주인공 '신돈'과
대비돼 더욱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기황후는 원나라에 바쳐진 공녀로서 황제의 부인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죠. 자신을 버린 조국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캐릭터에요.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온 공민왕을 고려의 왕으로 만들어 주기도 할만큼 대단한 힘을 가졌지만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죠. 지금은 보시는 분들이 제 이미지에만 관심이 가시겠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저를 미워하실지도 몰라요. 마음 단단히 먹고 있어요. 호호호."
현재 기황후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가 부족해서 결국은 작가, 연출자와 함께 기황후라는 인물에 대한 재해석으로 인물을 창조해가고 있다.
'태조왕건'에서 예상외로 '관심법'의 궁예가 오히려 더 부각됐듯 제작진과 김혜리는 기황후의 재발견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지난 1년은 다시는 그런 시간 안왔으면 하는 시기
점심도 먹었겠다. 작품얘기도 잘 풀렸겠다. 기자에 대한 긴장감이 덜해진 김혜리에게 지난 1년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음주운전사고,
결혼얘기가 오가던 상대와의 이별, 그리고 부친상. 부족할 것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그녀에게 지난 1년의 시간은 더이상 내려갈데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과 같았다고 했다. 대낮의 조용한 카페였지만 김혜리의 갑작스런 눈물은 기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화장이 지워질 만큼 흘린 눈물탓에 대화가 잠시 중단됐지만 이내 말문을 연 김혜리는 "지난 시간 너무 편하게 살아왔던것 같아요. 지금껏
아무런 고생없이 계단을 두세 계단씩 뛰어오르며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이 제게 시련을 주시고 이겨내보라고 시험하신
것 같았어요. 언제나 제게 힘이 돼주셨던 아버지한테 너무 죄송한 마음이 커요..."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연기에 대한 욕심은 마음속에서 꿈틀댔다.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연기에만 매진하겠노라면서.
연기하는게 이처럼 행복할 줄은 예전엔 몰랐다
김혜리는 그동안 각인돼온 이미지 탓인지 안해본 역할이 너무도 많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결코 쉽지않은 시골아낙이나 보통의 소시민 역할조차
해본적이 없다. 앞으로는 자신도 좀더 적극적으로 역할에 욕심을 내보겠단다. 가장 해보고 싶은 연기에 대해 물었다. 대뜸 "강혜정이요" 한다.
강혜정이라니? 강혜정을 연기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머리에 꽃꽂은 여인 강혜정을 지칭한 것이다. "여배우로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를 전부 버리고
완전히 인물속에 빠져들었잖아요. 아무나 쉽게 할수 있는 역할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이제 결혼해도 누구도 뭐라하지 않을
나이의 김혜리는 "지금은 맘편히 연기속에 푹 파묻혀 지내고 싶다"면서 "30대 여배우들이 예전과는 달리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이 나에게도 자극이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멈춤없이 연기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 김혜리에게서 최근 만나봤던 김혜수 김선아 전도연 김원희 염정아 이아현 같은 30대 여배우들의
한결같은 자신감과 연기욕을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