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봉우리들이 따스한 봄햇살에 한들거릴 즈음, 문화유산해설사는 버스내 마이크를 빼들고 대전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이라는 곳을 가리킨다. 지금은 타일을 파는 장소가 되었지만 여러 해 동안 주인이 바뀌고 숱한 사람들이 오고 갔을 그곳은 대전의 풍상을 모르는 척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앞쪽으로 붉은 대한통운 건물이 보이는 대전역 뒤편에 위치한 송시열 고택(송자고택)은 쉽게 알 것 같아도 동네사람조차 아는 이가 드문 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당시 넓은 땅에는 사랑채를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기울어지고 약간 변형된 ‘ㄷ’자형 안채만 남아있을 뿐이다. 솟을대문이 위엄을 부렸을 자리엔 철대문이 있었고 그렇잖아도 좁은 골목길을 파헤쳐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어놓아 행여 밟아서 주인에게 욕을 먹을까 사람들은 조심해 다니는 중이었다. 아직 주변 언덕에는 대숲이 남아 있었고 많은 주택들이 이 고택을 둘러싸고 위협을 가하는 형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 곳이 기호학파의 본거지가 되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왜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 것이여, 도대체 옛 어른 손때 묻은 것이 한 개도 없어.”
노인 한 분이 작년까지 건물을 새로 수리했다는
말을 듣고 하는 소리다.
“그래도 댓돌은 그대로 남아있네.”
옆에 있던 이들이 헛웃음을 짓는다. ‘헌것은 싫고 새것이 좋다’라는
편의주의 때문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들이 버려져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다음코스로 가는 도중 50여년 전에는 능청다리라고 불리던 철갑교에 내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대동천(파남천)을 보았다. 이 대동천은 식장산에서부터 보문고등학교 뒤편으로 물이 흘러 이곳에 이르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소제공원이라 불리는 예쁜 공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선돌형 장승만 두 개 남아있다. 지금도 해마다 대보름이 되면 2시부터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저녁 제 지낼 준비를 한다고 하는데, 황토를 뿌리는 이유는 악귀가 무서워하는 붉은 색을 이용해 액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옛 기국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었던 삼매당은 1930년 하천변에 있었던 관계로 침수가 우려돼 박계립의 9세손 박태흥이 오늘날의 장소로 이전했다. 박계립은 박팽년의 친척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동구 가양동에 거실을 지어 정원에 매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서편 정자 옆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오류정이라 했으니 사람들은 정식호인 삼매당보다 그에게 오류선생이란 별호를 붙이길 좋아했다. 삼매당은 측면 2칸 중 후면 1칸을 통칸으로 마루방을 꾸미고 전면 1칸에 툇마루를 깔았으며 양옆칸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했는데 마당 한쪽에 돼지형상의 돌이 특이하다.
남간정사로 가는 입구에는 중요 토론장이었던 기국정이 있었다. 기국정은 소제방죽 주변의 많았던 구기자와 국화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손자대에 와서 기와로 바뀌었다.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둔 남간정사는 우암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앞에는 큰 연못이 있고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2미터가 넘는 배롱나무가 사계절 운치를 더하지만 인부들이 축대를 잘못 쌓아 수문이 막혀 연못의 물이 썩어가고 있었다. 건물 뒤편에는 샘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해 연못으로 흘러가게 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정원 조경사의 독특한 한 면을 이루고 있다. 문화유산해설사는 “4월 중순경 버드나무 잎이 돋고 목련이 피면 정말 아름답다”며 “노랑할미새와 곤줄박이, 박새가 연못 가운데 서있는 버드나무에 앉아 싸우는데 그 소리가 담 너머에서 들리는 차 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느껴지지만, 도심 속에 자연의 소리가 남아있어 좋다”고 말했다.
우암사적공원 내에 있는 유물전시관과 송자대전 목판의 판고(보관소)를 둘러본 뒤, 주택가를 돌며 박팽년 유허지(집터)를 찾았다. 이 유허지는 350여년 전에 세운 비와 나무 몇 그루만 서있는 것이 전부다. 비각은 오석(오래가는 돌)에 글은 우암이 짓고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석공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새겼는지 한문의 ‘삐침’ 글자가 그대로 선명히 나타나 몇 백년 전에 새긴 글씨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집 옥상에 있는 까마귀도 사랑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박팽년의 집터냐 아니냐하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과 아직도 후손들이 주변에 사는 것을 볼 때 이 곳은 그의 집터임이 확실하다는 설이다.
문화유적은 이 땅에 누가 어떻게 살았나를 보여주는 가치있는 증거요, 본보기다. 또한 후손에게 길이 물려야할 재산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를 잘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취재|송윤영 협조|향토사료관 ☎042-580-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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